'0교시'는 왜 철옹성이었나
'0교시'는 왜 철옹성이었나
최근 0교시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사람들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듯하다. 한 TV프로그램에서 몰래카메라 방식을 이용하여 0교시의 폭압(暴壓)성을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비로소 기성 세대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처음 안 사람도 많다. 이를 통해 최근 사회 문제가 되니까 서울 교육청에서는 현장조사를 한다느니 하면서 수선을 피우는 듯하다. (한겨레신문 2002.3.7)
0교시는 어떻게 지속되었나
그러나 이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단순히 현상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0교시 문제를 보면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분명 0교시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TV가 먼저 제기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폐지론이 제기되어 왔는데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교육부와 교육청의 행동은 위선으로까지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제기가 왜 번번히 묵살되고 현재까지 존속되어 왔느냐이다. 그것은 일선 교육현장이나 교육 정책을 수립할때 교육 주체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0교시 수업은 실제로는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율학습과 함께 일찍부터 폐지의 주(主)대상으로 여겨졌다. 보충 수업은 오전에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실시되는 것이 있는가하면 오후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그 무용론과 폐지론은 8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었고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창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꾸준히 문제 제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조직을 중심으로가 아니더라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각 학생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그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민주화를 위한 교육 백서, 서울: 풀빛 1989 pp286-290)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번번히 무시되었다. 그것은 일선 교육이 교사나 학생의 의사를 철저하게 배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교조를 불법 단체 나아가 빨갱이 단체로 몰아 부치면서 이러한 논리는 위험한 논리로 매도되었다. 이러한 배제 속에서 0교시를 포함한 보충수업이 찬성하는 육성회 중심의 학무모와 교사, 사립학교의 재단들을 중심으로 공고하게 이루어졌다.
단순히 0교시를 없애느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육정책의 협의 과정을 어떻게 만드느냐이다. TV매체를 통한 외부적인 사회이슈화로 교육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 까지나 이러한 수단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육 개혁을 위한 일선 교육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주적인 협의 체제를 구성하느냐이다. 특히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학생을 훈육의 대상, 통제의 대상으로만 볼 때 언제든지 학생이 소외된 교육이 계속되고 그들의 고통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아직까지 학교운영위원회 논의도 이러한 점에서는 부족하다.
두번째, 이러한 0교시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입시교육의 대학 보내기 경쟁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비평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부분이 있다. 사실 비평준화 지역이 이런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더 심하다. 비평준화 지역은 그야말로 '경쟁'만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이 아니라 학교의 명예를 위해 존재한다. 이는 정규 교육 지침에도 없는 편법적인 수단을 부추겼다.
나는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7시시 30분까지 학교에 가야했다. 지금 불리는 0교시 보충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후에 보충수업을 다시 하고 저녁 뒤에 10시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했다. 이것은 3학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1학년 때부터 계속된 것이다. 이러한 일상을 보내느라면 아침에 엄청나게 피곤하다. 문제나 과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잠과의 싸움이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조차 모르기도 했다. 그때 받은 기억은 수업 내용이 아니라 헤롱거리던 자신이었다. 우리들은 오자마자 도시락을 까먹기 바쁘고 먹다가 걸려서 뭐 나오게 두드려 맞곤 했다. 배고파 먹는데 매까지 맞는 것을 TV에 방영했다면 그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여기까지 읽고 그게 뭐 힘드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 학교는 편했다. 옆에 학교에 아침 7시까지 가고 밤 12시에 나왔다. 그 학교에서는 정규 시간 전에 2과목을 수업했다. 그리고 일요일, 휴일에도 나와서 자율, 보충 학습을 했다. 우리는 그러한 학교가 너무도 많아 문제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학교는 그나마 편하다는 안도 아닌 안도뿐이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철저하게 대학 들어가는 숫자로 존재하는 비평준화 지역일수록 더욱 심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평준화의 존재는 평준화 지역에 끊임없는 압력을 가하여왔고 보충 자율의 경쟁을 불러왔다. 그것이 학교와 교사와 학생을 그렇게 만든다. 만약 비평준화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일시적으로 0교시가 없어진다고 해도 언제든지 부활할 것이다. 실력이니 경쟁력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따라서 0교시 폐지와 비평준화 반대는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세 번째 0교시를 지지하는 것은 과연 일부 몰염치한 학교당국자나 편협한 교사들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재학시 의식있는 교사들이나 전교조 관련 교사들을 제외하고 처음에 주위에서 보충이나 야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모두들 하는 말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그것도 못 견디면 이 험한 세상에 나와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 "했다. "누구나 다하는 것인데 너는 왜 그러냐! 좋은 대학 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대부분의 교사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들이 이러한 말과 논리의 연장에서 그러려니 묵인 방조 했다. 혹은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학교와 교사들이 책임 전가하면서 내세우는 학부모들이 가만있겠느냐는 말이 이 때문에 가능해진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과 지지가 학생들을 낭떠러지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말"들은 보충과 야자를 힘들어하면 심한 자기 모멸과 비하가 이루어지게 했다. 좋은 대학 가려고 남들 다 하는데 그것 하나 참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그 말은 단순히 아침을 못먹는 것보다 아침에 잠 하나, 배고픔 하나 못이기는 나 자신에 대한 학대가 이루어지게 했다. 밥을 못 먹어 육체적으로 불균형인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정신적인 불균형과 기아도 중요하다.
헝그리정신! "너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모멸과 비하를 하면서 정신적인 기아상태인 학생들이 많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밥을 제대로 못 먹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인 강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생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상태의 모든 정책은 그것이 아무리 학생들을 위한다는 아름다운 이름이라도 하더라도 정당성이 없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면서 모두 너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0교시를 방조하지는 않았는가 묻고 싶은 것은 이 때문에 0교시는 그 무수한 무수한 지적과 항의와 제기에도 불구하고 건재하게 존재해 왔다는 점 때문이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무용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심한 정신적인 자기 모멸과 피로 그리고 육체적인 배고픔과 싸운 기억뿐이다. 그때 고맙게도 '너를 위해서' 라며 배려해준 것이 나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내 게으름 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게으른 자가 대부분인 결과를 낳았다면 그것은 게으름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0교시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가 아니다. 그 동안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고 문제 제기가 묵살되어 오늘에 이르러 왔는가를 구조적 관계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과 새로운 교육 문제, 다른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 문제의 관계성이나 구조성을 무시하게 되어 교육정책을 사건 중심 별로 보게 된다. 이는 새로운 문제를 계속 발생시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0교시 문제도 단순히 0교시를 없애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0교시를 존재하게 하는 관계나 구조에 천착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학생의 의견이 반영되는 교육합의, 정책과정이 구축되어야하고 과다한 입시경쟁을 촉발시키는 비평준화제도도 함께 병행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한 아이를 위한다는 위장된 논리로 더 이상 비자발적인 교육을 정책이나 제도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강요하는 인식과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의 효과는 있을 지 모르지만, 당장 점수 조금 더 맞아서 전보다 약간 좋은 학교를 간다고 해도 한 번 가해진 영혼의 상처는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육체적인 배고픔이나 영양 불균형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하니리포터 김헌식 기자 codes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