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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6. 24. 22:54 krsg_diary
터키군

한국전쟁이 터지자 사흘 후에 터키 정부는 한국에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유엔에 통고했다. 터키는 우방 중에서도 상당히 빨리 참전의사를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5천90명의 1개 여단 병력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7일이었다. 본국에서 약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왔기 때문이다. 터키군은 청천강 부근인 군우리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역전의 전통에 빛나는 터키군으로서는 가장 쓰라린 고투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갔던 유엔군은 청천강으로 밀리고 있었다. 터키여단은 당시 미 9군단의 오른쪽 후미 지역인 군우리에 포진해 있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유엔군의 방어선을 뚫고 군우리 동북쪽 덕천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아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터키여단은 유엔군이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미 9군단의 우익을 사수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11월29일부터 벌어진 5일간의 전투에서 터키여단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터키군이 한국전선에서 처음으로 겪은 이 군우리 전투는 승리보다는 손실이 더 컸다. 적을 선제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적의 공격을 기다려 이를 막아내는 것이어서 희생은 더 컸다.

그 후 휴전협정 조인을 약 2개월 앞둔 1953년 5월 터키여단은 서부전선 고랑포 북쪽 2백m 정도의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적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전전선에 걸쳐 치열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터키여단이 맡고 있는 서부전선은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판문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특히 적의 공격은 치열했다. 터키여단이 맡고 있는 고지는 동·서베를린 고지와 웨가스, 엘코, 칼손, 에바 등의 전초기지가 활 모양으로 벌어져 있고 적과의 거리는 1㎞ 에 불과했다.

적의 공격은 5월15일 새벽 2시쯤 절정을 이루어 웨가스 고지에 집중되었다. 적의 공격은 이날 밤 약 2시간 동안 세 차례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터키여단은 포병대대의 포격과 조명탄의 지원을 받아 고지로 올라오는 적을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이날 밤의 전투에서 적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터키군은 30만 발 이상의 소총탄환, 9천4백발의 박격포, 4천4백여 발의 수류탄을 소비했으며, 포병도 7천7백여발의 포탄을 쏘았다. 이에 대해 적은 1만6백여발의 포탄을 쏘았고, 5백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월28일 저녁, 적의 대공세가 웨가스 고지에 다시 집중되었다. 터키군은 삼면에서 적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적이 워낙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동쪽의 소웨가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군은 다시 전력을 가다듬어 웨가스 고지를 탈환했다가 적에게 내어 주기를 다음날 새벽까지 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웨가스를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터키군은 웨가스 고지를 포기하고 엘코 고지 방어에 주력했다.

터키군은 이 전투에서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1백51명의 전사자와 2백45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적은 3천명 이상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던 것이다. 터키군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후퇴를 모르는 군인이었다. 이것은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투철한 군인정신과 엄격한 군율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국방부 정훈공보관실】
posted by 遊食